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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영욱 개인생각&글

밤이 남긴 자리

밤이 남긴 자리
제9장 | 밤의 끝을 걷다
글 │ 현원석
새벽 다섯 시가 가까워질 무렵,
도시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른다.
완전히 잠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은 시간.
나는 어느새 이 애매한 경계의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편의점 근무를 마치고 재고를 확인한 뒤,
불을 끄기 전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도로 위에는 몇 대의 차만이 지나가고 있었고,
가로등은 아직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하늘은 밤의 색을 조금씩 벗고 있었지만
아침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시간은 늘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이 거리는 수없이 지나온 길이었지만
언제나 운전석에 앉아
신호와 시간에 쫓기듯 지나쳤던 곳이었다.
걷는다는 선택은,
한 번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보도블록 사이에서
작은 풀잎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누군가 계획하지 않아도,
누군가 돌보지 않아도
자라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았다.
한때 나는 믿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고,
계획은 곧 안정이며,
안정은 성공과 같은 말이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계획표 어디에도 없던 이른 새벽을
아무 불안 없이 걷고 있다.
이 시간은
어쩌면 내게 허락된 틈 같은 것이었다.
편의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자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 불빛에만 매달려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불은 돌아갈 수 있는 자리였고,
이 길은 지금 서 있는 자리였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빵집의 불이 켜졌다.
셔터를 올리는 소리,
오토바이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
도시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를
천천히 통과하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늘 결과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과정을 느낀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보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빛이 구름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밤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잃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 밤은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놓고,
이제 조용히
다음에게 넘겨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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