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남긴 자리 6편
부제: 말해도 괜찮은 밤: 편의점이 건넨 조용한 위로
글 | 현원석
편의점의 문은 매일 똑같은 소리를 내며 열고 닫히지.
하지만 문을 통과해 들어서는 사람마다 그 소리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져.
이제 난 그 미묘한 차이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어.
밤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각자의 이야기들을 말이야.
그날 밤, 아직은 어둑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한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어.
말끔하지만 피곤함이 묻어나는 셔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구겨진 재킷, 그리고 손에 든 낡은 서류 봉투 하나.
그의 모습에서 나는 하루의 고단함과 짊어진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어.
그는 한참을 진열대 앞을 서성이다 캔맥주 하나와 봉지 라면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지.
"봉투 필요하세요?"
내가 묻자 그의 목소리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나왔어.
마치 이 늦은 시간, 이곳에 오는 것이 조심스러워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한 느낌이었지.
계산을 마치고도 남자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몇 번이고 떼었다 붙였다 하는 모습에서 그의 망설임을 느꼈지.
"야간 근무 오래 하셨어요?"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어.
"아직 얼마 안 됐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지. 그러자 그는
"그렇군요… 저도 요즘은 밤이 길어져서요. 낮에 일하던 데가… 정리됐습니다"
라고 담담히 말했어.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어. 지친 피로와 체념이 뒤섞인 그 눈은 애써 감추려 해도 모든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꺼냈어.
"저도… 비슷합니다."
그 말이 생각보다 쉽게 나와서 나조차 놀랐지. 그토록 무거웠던 마음속 이야기가 낯선 사람 앞에서 이렇게 가볍게 흘러나올 수 있다니.
"오래 하던 일을 접었습니다. 코로나 때부터…"
내 말은 거기까지였지만, 남자는 그 이상을 묻지 않았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셨군요"
하고 짧게 답해줬지. 그건 동정도, 섣부른 위로도 아니었어.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라는 조용하고도 깊은 공감의 표시였을 뿐.
남자는 맥주를 들고 편의점을 나서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남겼어.
"그래도… 이런 데 불 켜져 있어서 다행입니다."
나는 그 말이 편의점이라는 공간 자체를 넘어, 그 불빛 아래 있는 '사람'을 향한 말처럼 느껴졌어. 문이 닫히고 편의점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이전과는 다른,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고요함이었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어. 지난 삶의 무게를 '실패'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 낯선 사람과의 짧은 교감 속에서 나는 그것을 그저 '접었다'고 말했을 뿐이었어. 실패가 아닌,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한 페이지처럼 말이야.
그 작은 단어 하나의 차이가 내 안에 갇혀 있던 아픔을 날카로움 대신 추억으로 바꾸어 놓았지.
이제 기억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고, 나 또한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
이 새벽, 편의점의 불빛은 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져. 이곳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곳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되찾아오는 장소였어.
묻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고, 설명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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