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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영욱 개인생각&글

밤이 남긴 자리

밤이 남긴 자리
글 │ 현원석
제8장
젊은 날의 그림자
나는 계산대에 서서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
밤은 늘 비슷한 얼굴로 흘러가지만,
어느 순간에는 불쑥
전혀 다른 시간을 데려온다.
그날 새벽도 그랬다.
낡은 가방을 멘 청년 하나가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장 안을 한 바퀴 돌며
상품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고르는 눈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피하고 있는 눈에 가까웠다.
청년은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봉투…
괜찮으시면…”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봉투를 건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오늘도 일하셨어요?”
청년은 잠시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면접 보고 오는 길이에요.”
“늦었네요.”
“네.
야간이었어요.”
그의 말투에는
기대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도 최소한으로 준비한다는 것을.
계산을 마친 뒤
청년은 한참을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는…
여기서 오래 일하셨어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아직은요.”
그리고 덧붙였다.
“전에 하던 일은
좀 오래 했죠.”
청년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도…
언젠가는 오래 할 일을
찾고 싶어요.”
그 말은
내가 젊었을 때
수없이 혼잣말처럼 되뇌던 말과
너무 닮아 있었다.
청년이 나간 뒤
나는 계산대에 기대어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보다
그의 뒷모습이
더 오래 남았다.
젊었을 때의 나는
미래가 늘
앞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미래가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걸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내 젊은 날이
무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나는
그 방식밖에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이 밤을 살아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냉장고 문에 비친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본다.
주름은 분명 늘었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덜 조급하다.
나는 그 변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젊은 날의 나는
앞만 보고 달렸고,
지금의 나는
주변을 보며 걷는다.
속도가 달라졌을 뿐,
길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계산대에 서서
새벽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나는 그 밤 속에서
조용히
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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