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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영욱 개인생각&글

밤이 남긴 자리

밤이 남긴 자리
글 │ 현원석

제2장: 말하지 않은 시간
집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가구들이 놓인 자리도,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묵직한 초침 소리도, 부엌 창가에 기대선 화분의 고요한 숨결도, 그 어떤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허나,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그는 이곳이 예전의 그 공간이 아니라는 서늘한 직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낮의 집은, 놀라우리만치 넓어져 있었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는 늘 그렇게, 쓸쓸한 확장감을 안겨주곤 했다.

벗어놓은 신발 위로 그의 발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하게 울렸다. 텅 빈 공기가 그 소리를 한층 증폭시키는 듯했다. 삐걱이는 마룻바닥을 밟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내는 부엌에 있었다. 등 돌린 채 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고, 국물 끓는 소리가 정적으로 가득 찬 집 안을 끈끈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들어선 것을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그 정도의 익숙함 위에 쌓여 있었다.

"일찍 왔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놀라움도, 굳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확인이었을 뿐. 그는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짧은 대답 하나면 충분했다. 요즘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짧고 조심스러웠다. 불필요한 말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이 어떤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진 까닭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의 그림자를 읽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찻잔 속의 물처럼 자주 엇갈렸다. 아내는 무심한 듯 반찬 접시를 놓으며, 그의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지난 세월이 켜켜이 쌓인 거친 손등, 비록 일의 종류는 바뀌었을지언정, 그의 삶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밤 근무는 괜찮아?"

물론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위로에 가까웠다. 그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용해서 좋아."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밤의 편의점은 그에게 어떤 무거운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따위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질문들이 그곳에는 없었다. 그저 익숙한 적막만이 그를 감쌌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낮의 텔레비전은 세상의 모든 말을 떠들어대느라 바빴다. 그는 리모컨으로 소리를 조용히 줄였다. 그 순간, 비로소 침묵이 제자리를 찾아오는 듯했다.

아내는 빨래를 개며, 문득문득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속에는 걱정과 배려, 그리고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안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끈질기게 따라붙던 현실을 확인하는 절규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게 좋아."

그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은 지금의 그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감당하기 버거운 단어였다. 대신 '좋다'고 말했다. 조금 덜 부담스럽고, 조금 더 현실적인 어조로.

방으로 들어가 익숙한 낮의 옷을 벗고 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낮의 옷은 헐렁했고, 밤의 옷은 몸에 더 달라붙었으며 주머니가 많았다. 새로운 삶의 형태에 맞춰 필요한 것을 미리 챙겨야 하는, 그런 종류의 옷이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표정은 영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웠다.

문을 나서기 전, 아내가 그의 뒤에 서서 나지막이 말했다.

"무리하지 마."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굳어진 어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응. 천천히 할게."

그 말은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이자, 어쩌면 어둠 속에서 방황할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 같은 약속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그는 깜빡이는 층수 숫자를 응시했다. 층수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어떤 덩어리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에 도착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밖은 아직 환한 저녁빛을 머금고 있었다. 도시는 바삐 움직이던 하루를 정리하며, 서서히 밤의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늦췄다. 그림자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밤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